5월은 ‘가정의 달’이니 사람들은 이래저래 전화를 많이 걸 거야. 대다수가 스마트폰을 쓰니 세상 좋아졌지. 어버이날에 손자 녀석의 전화를 받은 순간, 그동안 통신수단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말하고 싶어졌어. 유선 전화기에서 삐삐, 시티폰, 카폰, 디카폰, 영상폰, 스마트폰까지….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변해왔어.
1896년 경복궁 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면서 전화 통화가 시작됐는데, ‘덕진풍’이나 ‘득률풍’이라는 말 들어봤어? 한성전보총국에서 영어의 ‘텔레폰’을 음역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해. 말을 전하는 기계라며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대. 광복 직후인 1946년부터 수동식 전화교환기가 서서히 교체됐지.
일제강점기나 광복 직후에도 전화기는 일반 대중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 1962년 체신 1호 시리즈가 개발되면서부터 대중에게 전화기가 보급됐어. 국내 최초로 생산된 체신 1호 전화기는 자석식,공전식, 자동식 3가지였어.
당시 정액 요금제에서 전화 도수제(度數制)로 바꾸자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도수제란 전화 건 횟수에 따라 요금을 매기는 제도야. “문명의 이기(利器)에 자물쇠까지. 도수제가 던진 파문. 사무 능률 저하 우려. ‘다이얄’ 판을 아주 떼거나 봉인한 관청도.”(1963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전화를 아껴 쓰자는 ‘전화 절제령(節制令)’을 설명하는 신문 기사야. 전화기는 멀쩡한데 고장 딱지를 붙이거나 자물쇠를 채우기도 했어. 예산이 빡빡한 관공서에서는 전화 한번 하려고 미리 결재를 받기도 했어. 요금이 좀 많이 나왔다 싶으면 누가 사적인 전화를 썼느냐며 멱살잡이하는 일도 벌어졌지. “전화기는 아껴 쓰고 통화는 간단히!” 이런 표어를 내걸고 일반인의 전화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어.
1970년대만 해도 집에 전화가 있으면 부자라고 했을 정도로 전화기는 귀한 물건이었어.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도 유명한 단어야. 백색과 청색은 전화기 색깔이 아닌 전화 가입대장 명부의 색깔이야. 전화선에 소유권이 설정돼있고 양도가 가능한 게 백색전화, 소유권 설정이나 양도의 개념이 인정되지 않는 게 청색전화였어. 당시 서울의 집 한 채 값이 230만 원 정도였어. 백색전화 한 대값이 260만 원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으니 부작용도 컸다고 해야겠지. 1973년에 체신 70호 시리즈가 개발되면서 지금 같은 전화기 모양이 보편화됐지.
광복 후 통신수단 ‘상전벽해’…스마트폰이 왠지 불편할 때도
시골에서 서울로 전화를 한번 걸려면 주민들은 우체국으로 가야 했어. 서너 시간을 기다려도 시외전화가 연결되지 않는 일이 허다했지. 그래서 교환원에게 음료수도 사다주며 빨리 연결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허다했어. 전화선 자체에 소유권이 설정돼 전화기가 재산이었으니 한 동네 한두 집에만 전화기가 있었고 그걸 온 동네 사람 들이 빌려 썼어. “OO네 전화 왔어요”라고 이장 집에서 방송하면 부리나케 달려갔지. 신발이 벗겨지고 넘어져 무릎 까진 사람도 많았어. 누구네 전화 왔다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알 수밖에 없었지.
1980년대에 전자식 교환기가 개통되면서부터 전화기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다기능 정보통신 기기가 됐지. 산업화와 더불어 전화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어. 교환원이 아닌 기계가 자동으로 연결시켜주는 다이얼식 전화기가 나온 거야.
그뿐만이 아냐. 1982년 12월 무선호출기인 ‘삐삐’가 나왔어. 삐삐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 주로 썼는데, 얼마 안 가 여기서도 ‘삐삐~’ 저기서도 ‘삐삐삐삐~’ 하며 난리도 아니었지. “당신과 나 사이에 저 삐삐가 있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중년 아저씨들은 노래방에서 가수 남진의 ‘가슴 아프게’ 를 패러디해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어. 사람들이 삐삐에 뜬 전화번호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어. 암호 같은 숫자 놀이도 삐삐 문화의 단면이었지. ‘8282(빨리빨리)’, ‘1004(천사)’, ‘1010235(열렬히 사모합니다)’,‘1200(지금 바빠)’, ‘0027(땡땡이치자)’, ‘5875(오빠 싫어)’ 같은 게 대표적이야.
1980년대에는 카폰도 나왔는데, 자동차에서 거는 전화였어. 카폰은 삐삐의 단점을 일거에 해소했으니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 그 당시 영화나 드라마엔 부유층들이 차 안에서 카폰으로 전화 거는 장면이 많이 나왔거든. 어쨌든 1990년대 이후부터는 전화기가 유·무선 겸용을 거쳐 복합 다기능 기기로 바뀌었어. “전화번호를 눌렀을 때 상대방의 전화번호가 LCD 문자판에 나타나 통화의 실수를 사전에 방지”(1993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한다는 기사도 있었듯이, 그 시절에 전화기 기술이 많이 발전했던 것 같아. 한 가구에 한 대꼴로 전화기가 보급돼 전국 어디서나 쉽고 편하게 전화를 할 수 있게 된 거야.
그러다 2000년대 초반엔 무선전화기가 대세가 됐어. 초창기의 무선전화기 하면 무전기나 냉장고를 떠올릴 거야. 그때는 큼직하고 묵직한 전화기가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웠지. 구보 씨도 무선전화기를 장만하고 나서 마치 군인이 무전을 치듯이 안테나를 쭉 뽑아내고 손을 길게 뻗어 통화를 했었지. 지금 스마트폰은 DMB 시청 때를 제외하고는 안테나를 쓰지 않지만 그때는 전화 안테나 자체가 정말 멋스러웠어. 그 후 뭉툭했던 무선전화기가 정말 야무지게 작아졌고, 유선전화기는 2010년 이후엔 거의 사무실용 정도로만 사용되는 것 같아.
광복 이후 통신수단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이야. 최근 신문에서 봤는데 우리나라의 스마트폰 사용자 수가 4,0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해. 아이에서 어른까지 안 쓰는 사람이 없는 거지. 뭐가 ‘스마트(smart)’인지 모르겠지만 전화기에 무슨 기능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어. 사실 구보 씨 또래는 스마트폰이 불편할 때가 더 많아. 그리고 젊은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너무 믿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생각들을 안 하고 사는 거 같아.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더 스마트하지 않게 만드는 측면도 분명 있는 거지. 기술이 발달해도 적당히 발달해야 하고 약간은 아날로그 냄새도 풍겨야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싶어.
이 시리즈는 박태원의 세태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년)의 주인공 구보 씨가 당시의 서울 풍경을 이야기하듯이, 우리가 살아온 지난 70년의 기억을 톺아본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