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탸게 토하난 긔적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발니 부난 바람의 형세 갓흐니/ 날개 가던 새라도 못 따르겟네.”
육당 최남선이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에 맞춰 지은 ‘경부 철도가’의 1절이야. 기차가 우렁차게 기적소리를 토하며, 남대문을 등지고 출발해, 바람처럼 달려가니, 날아가는 새보다 빠르다는 뜻이야.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우리나라에 철마(鐵馬)가 처음 달리기 시작했을 거야. 그런데 어느새 세월이 흘러 올 4월 1일에 호남선 KTX가 개통됐어. 서울에서 광주까지 1시간 33분 만에 갈 수 있다니, 이런 날이 오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
한국사진사연구소-서울의기차역-S2682
내가 열 살 때 광복을 맞았는데, 열한 살 때인 1946년에 아버지와 같이 ‘해방자호’라는 열차를 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광복 기념 특별 급행열차였는데 서울~부산을 9시간 만에 주파했다니까. 1955년에 통일호가 나왔고, 1960년에는 무궁화호, 1962년에는 태극호, 1966년에는 백마호와 청룡호, 1967년에는 대천호(서울-대천 준급행)와 비둘기호가 나왔어. 요즘에는 철도청도 영어 이름 코레일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 열차 이름이 얼마나 한국적이고 전통적이야! 촌스럽다고? 그때는 정말 세련된 이름이었다고.
그런데 1960년대의 기차는 석탄의 화력으로 달렸지. 화부 2, 3명이 번갈아가며 석탄을 땔감으로 붓고 ‘삑삑~’ 기적을 울리며 달렸다니까. 터널만 지났다 하면 승객들 콧구멍이 새카맣게 돼버렸어. 석탄가루가 엄청 바람에 날려 왔으니 그리 된 거야.
한국사진사연구소-기차역근처에서안전한곳을찾는사람들-S302
1974년엔 통일호와 새마을호가 나왔고, 1984년에는 열차의 모든 명칭이 바뀌었지. 보통 열차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는 통일호, 우등열차는 무궁화호, 특급열차는 새마을호라고 한 거야. 특별한 목적에 따라 새 이름을 붙인 경우도 많았지. 1955년에는 목포행 군용 열차 상무호가, 1962년에는 새마을운동을 위한 재건호가, 1966년에는 월남 파병을 위한 맹호호가 나왔고, 1967년에는 서울~부산 피서 열차인 갈매기호도 있었어. 월남 파병 때는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이나 애인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 많은 여자들이 맹호호가 떠나는 순간 열차로 달려들었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지. 왜 영화 보면 우루루 열차로 몰려가는 장면 나오잖아? 그 장면처럼 정말 눈물바다를 이뤘지.
잊지 못할 해방자호·통일호…철도 위의 비행기 KTX시대 활짝
그러다 2004년 4월 1일 KTX 시대가 열렸어. 부산에 갈 일이 있어 서울역에서 타고 갔는데 철도 위를 나는 비행기 같았어. 만약 예조참의 김기수 선생이 KTX를 타보셨다면 지하에서도 탄복하셨을 거야. 1876년에 일본에 갔을 때 기차를 처음 타본 소감을 한국인 최초로 남긴 분이야. 선생은 기차를 화륜거(火輪車)라고 하시며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의 화륜이 한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고 <일동기유(日東記遊)>(1877)에 기차를 타본 체험기를 세세하게 기록해놓으셨어.
남윤중-증기기관차-경기도의왕시월암동374-1철도박물관-O1510
열차를 소재로 한 노래도 많았지.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라는 안정애의 ‘대전 블루스’나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내가 젊었을 때 정말 자주 불렀던 노래야. 김현철의 ‘춘천 가는 기차’,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 GOD의 ‘기차’, 다섯손가락의 ‘기차 여행’, 김수희의 ‘남행 열차’,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아이유(IU)의 ‘기차를 타고’, 아이유와 김창완의 ‘너의 의미’ 같은 노래는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통해서 들었어. 괜히 열차를 소재로 썼겠어? 열차가 우리들의 발이 되고 추억이 서린 공간이었으니까 그런 거지.
생각해봐. 내가 중학교 때는 열차 통학을 했는데, 그때 학생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객차 연결 통로에서 늘 서서 가던 고등학생 형들의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이는 거야. 자리가 나도 안 앉고 꼭 거기 서서 우리들 군기를 잡았지. 조금 예뻐 보이는 여학생이 지나가면 괜히 짓궂은 말로 희롱하곤 했어. 어떤 때는 표를 끊지 않고 탔다가 검표원이 오는 것 같으면 맨 마지막 칸까지 도망가 결국 예닐곱 명이 열차 밖에 매달려 가는 경우도 있었어. 혼찌검을 당하곤 했지.
장세운-경암동철길-전북군산시경암동-2007-O90
어떤 어른들은 기분이 좋으면 바닥에 앉아 술판을 벌이기도 했어. 구성지게 육자배기 한 자락을 뽑거나 유행가 한 곡조씩을 뽑아내기도 했지. 1970~80년대쯤에는 대학생들이 야유회를 갈 때면 열차 안에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꽤 볼만 했어. 열차를 타고 이별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열차 안은 신명 나는 이동 공간이기도 했다는 말이야. 옆 사람에게 누가 될까봐 열차 안에서 전화 한 통 걸기도 어려운 요즘에 비하면 그래도 그때는 ‘가는 동안의 재미’라는 게 있었어. 다들 바쁘게 사니까 뭐라 할 건 없지만, 지금은 그런 재미는 없고 도착지까지 얼마나 빨리 가느냐만 있는 거 같아서 조금 거시기해. 그렇게 빨리 도착해서 뭐하시려고?
쿠바의 카스트로는 “인생은 수천 마일을 집어삼키는 열차”라고 했어. 열차를 타고 수천 마일을 가듯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게 인생이라는 뜻이지. 이 나이가 돼보니 이제야 조금 알겠어. 때로는 완행열차도 타봐. 창밖 풍경도 보면서 말이야. 경원선의 철도 중단점 백마고지역에는 가봤는지. 거기 녹슨 안내판에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가 쓰여 있지.
많은 사람들이 DMZ 기차여행을 가려고 하면 이 문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거야. 언젠가는 그 팻말을 뗄 날이 오겠지. 아니, 와야만 해. 호남선 KTX까지 완공됐으니까, 이제 우리 열차가 북한 땅을 달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어. 머잖은 날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완공되어 ‘철의 실크로드’가 열렸으면 싶어. 그날이 올 때까지, 언젠가 그날이 올 때까지, 구보 씨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해.
글·김병희(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