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로 유명한 독일 국경도시 아헨, 역에 내리면 마상(馬像)의 역동적 질주 모습이 인상적이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와 경계하고 중부도시 프랑크프루트에서 4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브레멘에서 유학하던 나는 주말이면 만나고 했던 막내와의 추억이 회상된다. 막내는 아헨에서 정보공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배관 시스템을 건물 밖으로 둘러친 모습이 이색적이었던 아헨병원의 화려한 치장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조카 한이가 태어나고 국경도시의 매력을 안겨다 준 아헨은 그래서 더 친근한데 벼룩시장도 진풍경이었다.
동생의 아파트 바로 밑 공터에는 한국인 상당수가 부러워하는 차종들이 가득한 중고차 전시장이었다. 메르세데스 벤츠, 폭스바겐을 비롯한 전세계 유명차들이 중고답지 않게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이 흔한 차들을 한국에서 마음껏 타볼 수 없는 현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여름 캠핑이 계획되고 봉고쯤 되는 12인승 차를 빌려 내 주변과 막내 주변인들이 벌이는 여름 나들이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새벽 브레멘에 도착한 우리일행은 오랜만에 육개장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독일에서 금지된 고사리 채취로 육개장을 맛있게 끓여주던 한이 엄마의 모습과 집안에서 금연을 강조했던 대목은 퍽 인상적 담론으로 여겨진다.
아헨을 벗어나면 곧장 아우토반으로 벨기에, 프랑스로 연결된다. 프랑스 도심 한복판에서 여장을 풀었다. 색다른 체험, 캠핑 플라츠(유럽 전역 도심에 텐트를 치고 잘 수 있도록 만든 곳)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캠핑 족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야외에 있는 호텔의 자유 공간 정도 되는 분위기는 구속의 분위기를 싫어하는 젊은 자유인들이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오스트엔데에서 벤츠를 밤배에 실은 일행은 엄청난 냉방의 위력을 실감한 채 밤을 보내고 아침 런던에 도착했다. 여권에 런던 도착이라는 스탬프가 하나 더 찍히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제 흔히 눈에 띄는 간이 식탁에서 호사스럽게 한국음식들을 포식하고 대영 박물관을 비롯한 이곳 저곳을 살펴본 뒤 하이드파크 캠핑 플라츠에서 야영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 에어컨으로 우리를 감싸며,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을 묵묵히 동행해준 벤츠 승합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제 겨울로 진입하면 그 벤츠 승합차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아니면 이태리 같은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나보면 어떨까하는 상상도 해본다.
세월이 가면 아름다운 추억은 새로워지고, 계절이 깊어지면 사람들이 더욱 그립다. 내 차들이 하나씩 이름을 바꾸어 나갈 때, 나는 떠나가는 그들에게 우리가 같이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 함께 했던 비밀, 비경을 같이 볼 때 느꼈던 동감을 떠올린다.
동물들이 가족으로 자리잡듯, 이제 우리의 차들도 가족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된다. 때론 불협화음속에 속을 썩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사랑을 베푼 만큼 사랑을 줄줄 아는 멋쟁이다. 우리의 차가 동성임을 아는 것도 재미있다. 남성에게는 여성의 부드러움과 유연함을, 여성에게는 약간의 터프함과 스피드감을 일깨우는 여유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