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이 가장 중시하는 생활의 조건은 햇살과 평온함이 있는 곳이다. 지역을 선택할 때에도 이 두 가지 조건은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파리라는 프랑스의 수도는 어떠한가? 파리를 포함한 수도권인 일드프랑스 지역은 변화가 많고 유동인구도 많다. 일드프랑스는 행정적으로 파리를 포함하며 인구는 1,200만 명으로 전체 프랑스 인구의 18%가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오는 유입인구도 많으며, 은퇴인구의 유출도 많은 곳이다.
대표 일간지 르 피가로지 기사 ‘프랑스인들은 은퇴를 이상화한다’ 기사에 의하면 일드프랑스 주민의 절반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의 48.3%가 은퇴 후 햇살과 평온함을 찾아 남쪽으로 떠난다. 일드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북부유럽에 가까우며, 남쪽은 지중해에 가깝기 때문에 기후와 일조량의 차이가 매우 심하다.
수도권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남부에 비해 적지만 약한 비가 자주 내리고 겨울철 일조시간이 매우 짧은 반면, 남부 해안은 바람의 영향은 좀 더 많이 받지만 여름에 건조하고 매우 더우며, 겨울에는 추운 반면 일조시간이 길다. 일조시간은 은퇴세대가 살아가는 데 있어 정서적, 정신적인 부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일드프랑스는 프랑스의 심장부로 신산업이 성장하고 국내 및 해외에서 인력의 이동이 심한 곳이라면 남쪽은 비교적 안정적이며,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을 바탕으로 지방색이 매우 강하다.
은퇴 후 수도권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이유에는 개인의 희망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 조건에 대한 고려가 우선된다. 우선 경제적인 요건이다. 은퇴 후 소득이 줄어든 상황에서 파리시내에서 제곱미터당 약 22유로 가량의 월 임대료를 내고 살기는 어렵다. 직장생활을 할 때 파리시내에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주택이 제공되기 때문에 생활이 가능했지만, 퇴직을 하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한 일간지 르 피가로의 발표를 역으로 해석하면 50%가 넘는 수도권 출신자들이 퇴직 후에도 수도권에 남아있다.
실제로 오랜 시간을 도시에서 살았다면, 익숙한 환경을 떠나 새롭게 모든 것을 개척해야 하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를 결심하기는 쉽지 않다. 돌아갈 곳이 고향인 경우에도 도시에 사는 동안 고향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의 유대관계가 없었다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떠나왔을 60세가 넘은 시점에서의 고향을 같은 시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방에 제2주택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하더라도 현지 주민들과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는 주민들의 인식으로 정착하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소통에도 어려움이 많은 것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 후 200여 년간 중앙집권의 전통을 지키다가 1982년부터 지방분권을 실시하였다. 지방분권에 관한 논의와 준비는 80년대 이전에 수십 년간 진행되어 왔으며, 80년대 사회당 정부 집권을 계기로 본격화 및 가속화 된 것이다. 여기에는 1947년 발행된 프랑스를 “파리와 사막”으로 비유했던 중앙집권에 대한 강력한 비판 저서를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교육과 복지 관련 인프라가 비교적 균형 있게 마련되어 있다.
프랑스의 경우 인구의 수도권 집중이 한국보다는 약한 편이며(전체인구의 18%), 마르세유, 리옹, 보르도 낭트 등 중심도시들이 흩어져 위치해 있고, 국경을 따라 여러 나라들이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 정도가 높다. 따라서 은퇴자들이 도시에서 살 것인가 농촌에서 살 것인가 보다는 도심에서 살 것인가 조금 외곽으로 나가서 좀 더 자연과 가깝고 윤택한 생활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교외로 이주할 경우 더 좋은 환경과 주택을 얻을 수 있지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자동차의 이용이다.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때에도 기차역까지 자동차를 타고 와서 이용하고, 장을 볼 때에도 자동차로 이동해야 한다. 또한 여행을 할 때에도 교통망의 중심은 대도시이기 때문에 이동에 따른 시간과 에너지 소비가 있으며, 해외로 떠나기 위해서는 대부분 파리의 공항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은퇴 직후에는 새로운 환경을 찾아 이주한 경우에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가 운전에 불편을 느끼며 다시 은퇴 이전에 살았던 도시로 돌아와 정착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또한 오래 살면서 형성된 생활환경도 은퇴 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많은 시니어들이 살던 곳에 그대로 살면서 이웃들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오랫동안 맺어왔던 이웃관계, 친구들과의 관계와 내가 잘 알고 이용하던 집 주변 환경, 빵집, 과일가게, 채소가게 등 오랜 시간동안 맺어온 관계는 너무나 소중하다.
은퇴 후 대도시에서 지속적으로 살게 된다면 어떤 점들이 고려되어야 할까? 먼저 물리적 주거환경이다. 나이가 들면서 주거환경에 필요한 요건도 달라진다. 즉, 편안함을 증가시키고 위험을 감소시키는 방향의 주택개조가 필요하다. 유럽에는 창문 바깥쪽에 덧문을 달아서 추위와 더위로부터 집안 온도를 유지하고 필요시 빛을 차단하는데, 이 덧문을 열고 닫기 위해 매번 창문을 열지 않도록 내부에서 버튼을 눌러 자동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자동 덧문으로 교체 하는 일, 예상치 못하게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턱을 없애고 실내 조도를 높이는 것, 샤워실 내에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의자설치, 욕조를 문턱이 없는 샤워시설로 교체, 샤워실 바닥에 미끄러짐 방지판 설치, 집안에 있는 계단을 자동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전기승강용 의자 설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국립주거청에서는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시니어들이 가능하면 최대한 독립적으로 본인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을 한다. 주거지원청은 연간 5억8,000만 유로를 지원하는데, 이 중 13%인 5,700만 유로를 시니어의 거주환경 개선에 할애하고 있다. 국립주거청은 주택 개조 시 필요한 공사비용을 지원하는데, 소득수준에 따라 소득이 가장 낮은 경우라면, 공사비용의 50%까지 지원해주고, 금액의 상한선은 1만 유로이다.
이밖에도 각 지자체별 재정지원이 있다. 국립주거청의 지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는 소득수준이 기준선을 넘지 않아야 하며, 살고 있는 주택이 신청시점을 기준으로 15년 이상 된 것이어야 한다. 공사 계획을 국립주거청에 내는 것은 일반인이 혼자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다. 국가에서는 상담전화 및 상담사 창구를 운영해 필요한 사람들이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