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률 45대 1. 특별한 교사를 뽑는 어느 시험의 지난해 서울 지역 경쟁률이다. 특별한 교사는 바로 ‘이야기할머니.’ 전국 7,300여 개의 유아 교육기관에서 옛이야기와 선현들의 미담을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할머니에게서 배우는 ‘무릎교육’으로 아이들은 바른 인성과 풍부한 정서를 기르고, 노후 세대는 삶의 활력을 얻고 있다.
“옛날 어떤 마을에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부부가 있었어요. 나무꾼인 남편이 며칠씩 집을 비우면 아내 혼자 시아버지를 돌봐드릴 때가 많았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한복을 입은 선생님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자 여섯 살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 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지게, 짚신 등 아이들이 처음 듣는 단어가 이야기에 나오자 선생님은 미리 준비한 지게와 짚신 모형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아이들은 직접 모형을 만져보기도 했다. 떠들거나 다른 행동을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10여 분간 진행된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고 질문했다. 한복을 입고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바로 ‘이야기할머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 리틀빌리지어린이집에서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는 강순배 씨(61)를 만났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는 아이들에게 교사가 아닌 할머니로 불렸다. 아이들은 그를 보는 순간 달려가 안기거나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손주를 만나러 유치원에 온 할머니 같았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살아왔어요. 그러다 네 살배기 손주를 위해 문화회관에서 동화구연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란 정부사업을 알게 됐습니다. 벌써 5년째 이야기할머니로 활약하고 있어요.”
이야기할머니가 된 계기를 묻자 강 씨가 한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손주들이 할머니 무릎을 베고 이야기를 들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누던 모습에 착안해 2009년 대구·경북에서 처음 시작됐고, 이후 교육적 효과가 커서 전국으로 확대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사업을 통해 유아들에게는 올바른 인성 함양 기회를, 여성 어르신들에게는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핵가족으로 변화한 현대 가족문화에서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다. 강순배 씨는 “오히려 제가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며 아이들과 만나면서 삶의 활력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반복되는 살림에 지쳐 얼굴에 그늘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명감에 책도 많이 읽고 공부하는 시간도 부쩍 늘었다. 자신을 따르는 아이들을 보며 강순배 씨는 점점 삶의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야기할머니에 선발되면 연간 70여 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여러 권의 이야기책을 읽고 외워야 한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외워서 들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야기할머니의 학습량은 많은 편이다. 강 씨는 이야기할머니 활동을 하면서 힘든 것보다 보람을 느낀 적이 훨씬 많단다. 유치원 경험도 그에겐 특별했다.
“제가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했던 유치원에서 미술시간이 있었어요. 가족을 그리는 시간이었는데, 아이들 대부분이 엄마와 아빠만 그리더라고요. 아이들에게 조부모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어요. 그런데 이야기할머니로 아이들과 만나고부터는 이제 할머니도 엄연한 가족이라고 인정해가더라고요.”
이야기할머니 사업이 4~7세 아이들에게 올바른 인성 함양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문체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은 올해도 ‘이야기할머니’ 제9기를 모집하고 있다. 고정된 직업이 없는 만 56세~만 70세 여성이라면 학력과 자격증 유무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3월 10일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이야기할머니사업단에 우편으로 지원 서류를 접수하면 된다. 서류 합격자에 한해 면접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된다. 그러면 이야기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강순배 씨는 이렇게 답했다.
“이야기할머니의 말과 행동이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아이들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늘 공부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해요. 아이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배우니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적절한 거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야기할머니의 활약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