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니!”
서울 성북구 고려대 후문 앞에 위치한 유정식당. 식당을 들어서는 학생들이 느닷없이 어머니를 부른다. 음식점 사장 최필금(60) 씨를 부르는 호칭이다. 30년째 이곳에서 식당과 하숙집을 운영해온 그에게 어머니 호칭은 낯설지 않다. 최 씨에게 학생들은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이다. “밥 주세요” 하고 몰려드는 학생들에게 그는 메뉴를 물어보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밥상을 차린다. 영락없는 엄마표 집밥이다. 하숙생들이 밥을 먹으러 오는 매일 아침 7~9시, 저녁 5~7시는 최 씨에게 가장 바쁘지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부족한 것은 없는지, 반찬은 입에 맞는지 살피며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다. 학생들도 “밥 더 주세요”, “국 더 주세요” 하며 제 집인 양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편하게 식사한다. 유정(有情)식당의 이름처럼 식탁엔 정이 넘친다.
학생들이 최 씨를 어머니처럼 대하는 이유는 비단 밥맛 때문만이 아니다. 음식점과 하숙집을 운영해 번 돈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은 사실을 학생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 그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총 2억4,700만 원을 고려대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지난해부터는 고려대가 학교 발전을 위해 시행하는 소액 기부 운동인 ‘KU 프라이드 클럽’ 회원으로 등록해 매달 30만 원씩 정기 기부도 하고 있다. 학교 측은 최필금 사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운초우선교육관 3층에 그녀의 이름을 딴 ‘최필금 강의실’을 마련했다.
30년째 서울 성북구 고려대 인근에서 유정식당과 유정하숙을 운영하는 최필금 씨
인근 대학교에 10년 동안 2억 원 이상 기부
어려운 학생들에겐 하숙방 공짜로 내주기도
최 씨는 이 같은 나눔의 이유를 자신의 삶에서 찾는다. 학창 시절 맘껏 배우지 못하고 실컷 먹지 못한 서러움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부산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돈을 버느라 졸업을 못 했어요.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아픔이 있다 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그렇게 기특해 보이데요. 반찬이라도 하나 더 얹어주고 싶고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학교 앞에 하숙집과 식당을 연 것도 학창 시절 저 같은 학생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에서 시작한 거예요.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최 씨는 스물세 살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남편은 중동으로 돈 벌러 가고 그녀 혼자 남아 아이들을 키우느라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시장에서 라면을 팔고 낚시터에서 밥장사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1985년 세를 얻어 하숙집을 차렸다. 그런데 하숙집을 하던 집이 팔려 더는 운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하숙집을 찾는 학생들을 위해 빚까지 내면서 운영을 계속했다.
유정하숙이 지금까지 문을 닫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유정식당과 마찬가지로 최 씨와 학생들 간 가족적인 분위기 덕분이다. 최 씨는 바쁜 학생들을 위해 옷은 물론 양말과 속옷까지 직접 세탁해주기도 한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방을 그냥 내주는 경우도 있다. 현재 하숙집에 묵고 있는 몽골 유학생 역시 몇 달째 하숙비가 밀렸지만 최 씨는 “괜찮다. 나중에 성공해 갚으면 된다. 가진 것 없는 학생들을 어른들이 돌봐줘야 한다”고 말했다.
유정하숙은 법과대학과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하숙생 중에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많았다. 30년간 1,000여 명의 학생이 유정하숙을 거쳐 갔고, 그중 사법시험 합격자만 200~300명 가량 된다. 1986년부터 유정하숙에 살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현재 변호사를 하는 조영봉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전했다.
“최필금 사장님은 손이 크고 인심이 좋으셨어요. 제가 한번은 친구를 하숙집에 데리고 가서 밥을 먹는데도 눈치 하나 주지 않고 밥을 많이 퍼줬지요. 아픈 곳은 없냐,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 하며 늘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셨어요.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어머니처럼 살뜰히 챙겨주신 사장님의 공이 큽니다.”
형편 어려운 운동부 학생들에게 공짜 밥 제공
생일 맞은 홀몸노인들에겐 생일상 차려줘
최 씨의 학생 사랑은 더 큰 이웃사랑으로 번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인근 중·고등학교 운동선수 중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다. 유정식당에서 유니폼을 입은 운동부 선수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운동량이 많은 만큼 학생들의 식욕도 왕성하다. 이 때문에 어느 식당에서는 운동부 단체 식사를 거부하기도 한다지만 유정식당에서만큼은 맘껏 배를 채울 수 있다. 넉넉한 인심에 마음까지 푸근해지니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또 2005년부터는 인근 종암중학교와 숭례초등학교의 소년·소녀가장 2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매달 성북구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의 생일상을 차려주는 일을 시작했다. 생일을 맞이한 노인을 유정식당으로 초대해 직접 불고기를 요리해 대접한다. 올 추석 때는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송편을 나누었다. 최 씨는 “자신의 특기인 요리를 통해 이웃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이 같은 나눔의 공로를 인정받아 최 씨는 지난 10월 국민대통합위원회로부터 ‘생활 속 작은 영웅’으로 뽑혔다. ‘영웅’은 누군가를 돕는 일이 곧 행복이라고 말했다.
“제가 조금만 신경을 쓰고 베풀면 누군가가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잖아요. 그러니 봉사를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어요. 모든 건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에요. 저만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습니다.”
자신이 차려준 밥그릇을 뚝딱 비워내는 학생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학생들보다 두 뼘은 작은 키에도 누구보다 큰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