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뮤즈(Muse)는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시인과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로 묘사된다. 로댕의 영원한 뮤즈로 꼽히는 카미유 클로델처럼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키는 낭만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먼저 인정받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과 청마 유치환, ‘꽃’의 시인 김춘수 등에겐 통영이 그와 같은 뮤즈였다. 한결같이 푸른 바다와 그림처럼 떠 있는 작은 섬들, 생의 에너지로 가득한 항구는 이들에게 아름답고 귀한 영감이 돼 주었다. 이들의 손에서 음악과 시, 그림으로 다시 태어난 통영을 더듬어 걷다보면 어느새 당신도 이 작은 도시에 완전히 매혹될 것이다.
통영 강구안의 전경
당대 예술가들의 아지트…‘통영 르네상스’의 미학
우리나라 예술사에 전설처럼 남은 작가모임이 있으니 바로 ‘통영문화협회’다. 윤이상과 유치환, 김춘수를 비롯해 화가 전혁림과 시조시인 김상옥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이 이 모임에 속했다. 서울도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이뤄진 예술가모임이라고 하기엔 그 면면이 무척 화려하다.
해방 직후에 결성된 이 모임은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배우지 못했던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야간학교를 여는가 하면 연극을 통해 대중의 일상 깊숙이 문화예술을 전파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모임은 1년 6개월 남짓한 짧은 활동으로 끝이 났지만 이 시기를 ‘통영 르네상스’로 평가할 만큼 그 업적과 영향은 대단했다. 협회의 연장자이자 회장을 맡았던 유치환의 문학관에 가면 이들의 흔적을 보다 가까이에서 만나볼 수 있다.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의 모습
정량동의 망일봉 기슭에 자리한 청마문학관은 본래 태평동에 자리했던 청마의 생가를 옮겨와 복원한 곳으로 그의 일생과 시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문학관이 함께 세워져 볼거리가 풍성하다. 특히 문학관을 들어서는 순간 전면을 가득 채운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 사진 속의 주인공들이 바로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이다.
협회가 결성되고 야유회 삼아 떠난 통영의 미륵산 계곡에서 촬영한 사진이라고 하는데 멋스런 중절모를 눌러쓴 김춘수와 멀끔한 양복차림의 윤이상, 검은색 뿔테안경을 쓴 유치환, 날렵한 턱 선이 인상적인 전혁림 등이 한 장의 사진에 함께 찍힌 모습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문학관 한편에는 유치환이 윤이상과 김춘수 등에게 받은 편지도 전시돼 있어 이들 사이의 예술적, 정신적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윤이상기념공원 한편에 자리한 윤이상의 조각상
윤이상의 음악선율에 취한 통영
통영 시내를 지나 도천동으로 향하면 윤이상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통영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고향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며 수십 곡의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통영 충렬초등학교의 교가는 윤이상이 작곡하고 유치환이 가사를 붙였다고 하니 당대의 풍요로운 예술 환경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곳 기념공원에는 윤이상이 직접 적은 악보를 비롯해 그가 독일 유학시절부터 사용했던 바이올린과 여권 등 다수의 유품, 독일문화원이 수여한 괴테메달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주변으로는 잠시 걸음을 쉬어갈 수 있도록 작은 공원이 마련돼 있는데, 이곳에선 윤이상의 음악을 주제로 한 작은 음악회가 수시로 열려 주민들의 고마운 휴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이번 여행의 시작인 청마문학관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세병관은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과 함께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큰 규모다.
박경리는 세병관을 가리켜 “통영 사람들에겐 마음의 의지이자 두려움 그 자체”라며 “인공적인 것이 아닌 사명감을 갖고 태어난 건물”이라고 적었다.
50년 만에 찾은 고향에서 낯설게 뒤바뀐 풍경에 어리둥절했던 그녀가 반가움의 눈물을 흘렸던 곳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병관이다.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사용된 군사시설임에도 세병관이란 이름의 뜻을 풀자면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무기를 닦는다’는 의미다. 전쟁으로 얼룩진 어두운 시대를 지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던 예술의 도시 통영의 상징적인 건물이라 하겠다.
박경리기념관에는 작가가 직접 원고지에 적은 육필원고 다수가 전시돼 있다
통영 바다와 어우러진 김춘수·박경리 문학기행
충무교를 건너면 멀리 통영항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한편에 김춘수유품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협회의 막내이자 선배 예술가들을 살뜰히 챙겼다는 그는 통영중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47년에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이후 대구와 서울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게 됐지만 그는 자신의 글에서 “바다가 없는 곳에 사는 것은 답답하다”며 “내 고향 통영 앞바다 - 한려수도로 트인 그 바다는 내 시의 뉘앙스가 되고, 그 뉘앙스는 내 시가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든 그 바닥에 깔린 표정이 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의 유려한 시구와 철학적인 시 세계의 바탕에는 통영의 아름답고 깊은 바다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육필원고를 비롯해 생전에 사용했던 가구와 옷가지 등이 전시된 공간을 둘러보다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색색깔 나비넥타이에 눈길이 머문다. 중절모에 나비넥타이를 한 노시인의 사진을 보니 앞서 청마문학관에서 보았던 한껏 멋을 부린 젊은 시절의 김춘수가 떠올라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통영항이 보이는 바닷가 한편이 자리잡은 김춘수유품전시관 내부
김춘수유품전시관에서 걸어서 15분 남짓이면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함께 통영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또 한 명의 예술가, 전혁림의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바다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시시각각 바뀌는 통영 앞바다의 풍부한 색채를 화폭으로 옮기는데 평생을 바쳤다.
아흔이 넘어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권력화 된 중앙화단 대신 고향인 통영을 지키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했다. 그가 30년 넘게 생활하던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고스란히 건축으로 옮겨와 마치 하나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독특한 색감을 만나볼 수 있다.
미술관 내에는 그의 대표작과 관련 사진자료들이 전시돼 화가 전혁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김춘수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그는 오랜 친구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에 어울리는 판화작품을 제작해 장르를 뛰어넘는 예술적 교류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왕이면 발로 걸으며 이들의 마음의 거리를 더듬어보는 것도 좋겠다.
산양읍으로 넘어가면 통영이 낳은 위대한 작가 박경리의 기념관이 반겨준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결혼을 하면서 통영 출신의 다른 예술가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 통영은 늘 주요한 배경이 됐다. 그의 대표작 ‘김약국의 딸들’에선 아예 통영의 시내 풍경이 자세히 묘사되기도 한다.
기념관 뒤편에는 그녀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는데, 단출한 묘소를 등지고 서면 드넓은 통영의 짙푸른 바다가 가슴으로 달려와 안긴다. 그녀가 ‘어머니의 태’와 같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고향땅, 통영이다.
글·사진 권다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