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친구’에서 배우 유오성은 ‘친구가 한자인줄 알았는데 우리말’이라며 장동건에게 친구의 뜻을 설명한다. 하지만 친구는 우리말이 아닌 한자인 것을 유오성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친구는 ‘오래 두어도 좋은 벗’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에겐 아내를 평생의 좋은 벗으로 만들어준 정말 좋은 친구가 있다. 10년이 훌쩍 넘은 자동차였다.
십년지기면 오래두어 좋은 친구의 범주에 당당히 들어가리라 생각한다. 친구인 자동차는 아내와 모든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음에 더욱 애착이 간다. 결혼 전 아내와 주말마다 추억을 편집하듯 경치 좋은 곳, 가볼 만한 곳으로 소개된 곳들을 찾아 다녔다. 양수리의 아침 물안개를 맞으며 유혹 많은 양평을 지나 젊음의 괜한 자유가 느껴지는 춘천, 메밀꽃이 하얀 바다를 이룬다는 소식에 찾아갔다가 빈 물레방아간만 보고 돌아왔던 봉평, 아직도 있을까 궁금한 사랑의 메시지를 적어 장승 밑에 파묻어 놓고 왔던 평창 장승마을, 허브가 동화를 만드는 허브나라, 보기만 해도 신이 나는 설악산, 그리고 낭만을 찾는 연인들의 종착지인 동해안 정동진이 모습을 매년 화려하게 바꿔가는 것도 지켜봤었다.
듣기에 느긋하기 만한 옛날 영화 필름 같은 추억 속엔 우리만의 조급함이 묻어있다. 어디를 가서든 늘 하루 안에 돌아와야 한다는 장인어른의 말씀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어머니 시대의 통금 5분 전처럼 손을 잡고 뛰지는 않았으나, 달리는 자동차에 채찍질을 가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동해안까지 가서 하루 안에 돌아오려니 어느 날은 18시간을 운전한 적이 있다. 아내를 평생 반려자로 만들기 위해 며칠 걸려할 운전을 하루에 다하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던 것이다.
사진제공: 오브젝트 필름
자동차의 도움으로 그렇게 추억을 쌓아가던 중 어느 날 친구가 심술이 났는지 충청도 옥천 근처에서 멈춰버리는 일이 있었다. 겨울 7시, 낯선 지방에서의 겨울 어스름과 반갑지 않은 눈은 갈 길이 막막한 우리에게 불안감만 더해줬다. 처음으로 레커차에 매달려 덜컹거리는 자동차를 타보았다. 새로운 경험이지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닌 듯하다. 그리곤 고치는데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카센터의 우울한 선고를 받았다.
밤을 넘기지 않겠다는 장인어른과의 약속을 못 지킬 지경이었다. 무작정 아내를 데리고 옥천 버스터미널로 갔다. 서울행 막차가 출발 5분 전을 남겨 놓고 있었는데 버스표가 매진됐다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머리속에 한자씩 타이핑되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반가운 목소리, ‘저, 죄송한디유, 이 표 환불 안되남유?’ 초로의 한 아주머니가 표를 환불하러 온 것이었다. ‘네, 제가 살께요’ 표를 빼앗듯 받아든 나는 아내에게 표를 쥐어 주고 등을 떠밀어 버스에 올라 좌석을 확인해 줬다. 나를 홀로 남겨두고 가는데 대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아내의 큰눈은 검은 빛이었다. 아내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나와 친구는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옥천을 출발했다. 그 후로 장거리를 갈 때엔 친구의 상태부터 꼼꼼히 살피는 좋은 습관이 생겼다.
통계를 보니 국내 자동차 사용 평균 수명이 3년7개월이라고 한다.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남녀평균 75살임을 감안할 때 10년 된 나의 자동차는 200살이 넘은 나이다. 비록 노구이지만 친구는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제 친구는 아내와의 추억을 머금은 채 새로운 추억, 지난해 태어난 10개월 된 아들녀석과 새로운 추억을 기다리고 있다.
“오래두어 좋은 벗, 친구여, 함께 있어줘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