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
구수한 입담으로 1960∼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원한 희극인 구봉서 씨(87). 지금도 무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 구 씨는 1945년에 악극단 악사로 데뷔해 사흘만 하기로 한 대역배우 생활을 시작으로 평생을 사람들을 웃게 하는 희극배우 인생을 걸어왔다.
재치 있는 애드립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면서 인기를 얻은 구 씨는 1958년 영화 ‘오부자’를 비롯해 ‘굳세어라 금순아’(1962), ‘돌아오지 않는 해병’ ‘남편은 바람둥이’(이하 1963), ‘대머리 총각’(1968) ‘남자는 괴로워’(1970) ‘남자 가정부’(1980) 등 300여편 이상의 영화를 찍은 원로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구 씨는 1969년 MBC 개국과 동시에 전파를 탄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한국 코미디계의 황금기를 개척했다. 비실이 배삼룡, 살살이 서영춘, 후라이보이 곽규석 등과 활동하며 콩트와 해학이 깃든 코미디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2013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소감을 물어보자 그는 공을 대중들에게 돌리며 감사함을 전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 그는 여전한 우리 시대의 ‘막둥이’이자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다.
여든 일곱이란 나이가 무색케 여전한 입담과 재치가 번쩍이는 구 씨를 서울 잠원동 자택에서 만났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이 시대의 영원한 희극인 구봉서 씨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막둥이’ 애칭…‘웃으면 복이와요’로 큰 인기 누려
“전 찰리채플린이 좋아요. 채플린의 연기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함께 메시지를 주잖아요. 삶의 애환이 채플린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있죠. 지평선을 향해 하염없이 걸어가는 채플린의 연기는 정말 일품이예요. 그런 게 희극의 지향점이어야 하고요. 코미디에 대해 아직도 저평가하는 시선이 있는데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주는 건 충분한 가치있는 일이거든요.”
구 씨는 열아홉살 때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이 이끄는 ‘태평양 가극단’에 악사로 입단했다. 악사가 된 구봉서는 어느날 잠적한 배우를 대신해 무대에 서게 되고, 재치 있는 애드립으로 관객을 사로잡으면서 희극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처음엔 사흘만 배우 자릴 메꿔달라고 하더라고요. 사흘만 하자고 한 것이 평생 이 일을 하게될 지 누가 알았겠어요. 남들 보기엔 제가 끼가 있었나봐요. 자꾸 잘한다 잘한다 추켜세워주니 더 신이나 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제 희극배우 인생도 시작됐죠.”
구 씨는 1958년 출연한 영화 ‘오부자’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유명인사가 됐고 전국민들에게 ‘막둥이’란 애칭도 얻게 됐다. 첫 주연작 ‘백만장자가 되려면(1959)’과 ‘구봉서의 벼락부자’(1961),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수학여행’(1969), ‘내것이 더 좋아’(1969), ‘당나귀 무법자’(1970) 등 숱한 히트작을 남겼다. 김수용, 이만희, 유현목 등 당대 대표 감독들과 호흡을 맞추었다.
“오부자는 제게 의미가 참 깊어요. 4형제 중 막내 역할을 맡아 ‘막둥이’란 애칭을 얻으며 본격적인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됐죠. 막둥이란 애칭을 아직까지 기억해주잖아요. 수학여행, 돌아오지 않는 해병도 기억에 남고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을 많이 했지요.”
구 씨는 스크린 뿐만 아니라 브라운관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6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를 통해 TV 코미디에 진출한 그는 전성기를 누리며 한국 코미디계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웃으면 복이와요’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에 옹기종기 모여든 국민들은 지금도 구 씨의 걸죽한 입담과 유머를 기억한다. 구 씨는 ‘비실이’ 배삼룡과 70년대 한국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끈 명콤비였다. 그 시절 집안 곳곳마다 구 씨와 배 씨의 유행어를 따라하느라 배꼽 꽤나 잡았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희극배우’로 기억되길”
그에겐 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명콤비가 있다. 바로 후라이보이 곽규석이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은 1964년 TBC(동양방송) ‘쇼쇼쇼’ 진행을 맡으면 서 큰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스탠딩 코미디를 창시했으며 구봉서와 콤비를 이뤄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70년대 중반,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낳으며 인기를 끌었던 한 라면 회사의 TV 광고가 바로 곽 씨와 구 씨가 함께 출연한 광고였다. 구 씨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곽 씨는 안타깝게도 1999년 생을 마감했다. 구 씨는 생전에 곽 씨가 살아있더라면 무대에서 콤비를 이뤄보고 싶다는 속내를 밝혔다.
“우린 호흡이 참 잘 맞았어요.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새어나왔죠. 그만큼 서로 눈빛만 봐도 잘 알았죠. 곽규석 등 그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과 무대에 다시 서고 싶긴 하죠.”
먹고 사는 게 퍽퍽했던 시절, 전 국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해주었던 그는 한국 대중문화의 어려운 시절부터 지금까지 긴 세월을 함께한 살아있는 역사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구 씨는 대중들에게 영원한 ‘희극배우’로 남고 싶다고 전했다.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웃음 하나로 버티던 시절이었지만 행복했어요. 한 평생 열정적으로 배우로 살아왔어요. 지금도 불러준다면 무대에 서고 싶어요. 국민들이 절 떠올릴 때 ‘희극배우하면 역시 구봉서지’, 하며 기억해줬음 좋겠네요.”